중세 유럽의 상류사회에서는 식사 전에 주방장이 반드시 해야 할 절차를 겪어야 밥을
먹기 시작했다. 식탁에 차려진 접시나 포크 나이프 스푼을 빵으로 닦고 닦은 그 빵을
그 자리에서 먹어보이는 절차가 그것이다. 그로써 그 식구(食具)들에 독(毒)이 묻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주방장의 의무였던 것이다. 또한 소금 그릇에는 자물쇄
가 채워져 있게 마련이요, 식탁에서 주인만이 소금을 칠 수 있게끔 에티켓이 돼 있기
도 했는데 이 역시 소금처럼 생긴 극약 아비산(亞砒酸)을 소금에 섞지 못하게끔 하는
독살 예방 문화의 생활화랄 수 있다. 이 처럼 서양 사람들은 예부터 독살 공포 속에
살아 왔고 그만큼 독살이 성행했던 것이다.
17세기 프랑스의 블랑비리에 후작부인 사건은 서양의 독약 문화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이 후작부인은 정부(情夫)의 상속을 위해 아버지-형재간을 비롯, 10여 명의 혈
족을 독살했고, 그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루이 14세의 애인인 몽테르랑 부인을 비
롯, 수십 명의 귀족 부인, 고관-원수(元帥)부인들이 상속을 위한 독살 비밀 결사를 맺
고 점진 살인을 실행하고 있음이 들통이 나 귀부인들의 집단 화형(火刑)을 집행하고
있다.
프랑스의 현행 형법 302조에 독살하는 자는 부모를 죽인 자와 똑같은 1급 살인으로 극
형에 처한다고 돼있다. 우리 형법에 독살 조항이 따로 돼 있지 않은 것과 비교해 봄직
하다.
이 독살의 현대적 표현이 화학 살인이요, 서양의 대량 화학 살인의 역사도 그래서 유
구하다. 이미 기원전 5세기에 스파르타군(軍)이 아테네를 침공할 때 유황을 태운 독가
스를 쓰고 있고, 기원전 3세기에 카르타고군(軍)은 마취제를 넣은 포도주를 로마 병사
에게 먹여 전세를 역전시키고 있다. 1차 세계대전 중에는 독일군이 염소(鹽素) 가스로
연합군 1만 5천명을 5분 간에 살상하고 있다. 2차 대전 중 나치스가 독가스로 수백만
유태인을 대량 학살한 것이야말로 유럽 독살 문화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이 화학 무기로는 신경을 마비시켜 치사케 하는 VX, 혈액에 스며들게 하는 염화시안,
폐를 침식시키는 호스겐, 옷 속으로 스며 살을 썩히는 마스타드 가스, 사람을 미치게
하는 바담사이트 등 다양하다. 대체로 한 방 쏘면 60 평방킬로미터 퍼져 그 안에 있는
사람의 50%를 죽일 수 있는 가공할 무기들인 것이다.
그래서 이미 고대 로마의 법률가로 하여금 `전쟁은 외상(外傷)시키는 병기로 싸울 것
이지 내상(內傷)을 시키는 독물로 싸워서는 안된다'고 전쟁도의의 국제화를 부르짖게
하고 있다. 그런지 수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것을 못 버리고, 지금 열리고 있는 화
학 무기 폐기에 대한 파리회의도 일방적 포기 선언들은 하고 있지만 피장파장될 것 같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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